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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중심, 어휘』 옮긴이의 말

자연을 닮은 2008. 5. 7. 12:06
 

옮긴이의 말


  이 책은 데이비드 싱글턴(David Singleton) 교수가 2000년에 낸 Language and the Lexicon: An Introduction(London: Arnold, xii+244)을 번역한 것이다. 원서의 제목을 직역하면 ‘언어와 어휘부’가 되겠지만 책의 주제를 생각하여 번역서의 제목을 ‘언어의 중심, 어휘’로 정하였다.


  지은이는 아일랜드의 더블린대학교(University of Dublin) 삼위일체대학(Trinity College)*  언어소통과학부(School of Linguistic, Speech and Communication Sciences) 언어소통학과(Centre for Language and Communication Studies)에서 응용언어학을 전공하는 교수이다. 지은이는 1948년 영국 남서부 도싯(Dorset) 주의 자그마한 항구도시 풀(Poole)에서 태어났다. 더블린대학교 삼위일체대학에서 프랑스어 및 독일어 전공으로 학사학위를 받고 1977년에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프랑스언어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0년에 더블린대학교에 부임했고, 1982년부터 1985년까지 아일랜드응용언어학회(Irish Association for Applied Linguistics) 회장, 1993년부터 1996년까지 국제응용언어학회(Association Internationale de Linguistique Appliquée) 총무이사, 1999년부터 2003년까지 유럽제2언어학회(European Second Language Association) 회장을 지낸 바 있다. 의미론, 어휘론, 제2언어 교육론에 관한 연구를 해 왔는데 최근에는 제2언어 교육론을 주로 연구하고 있다. 1999년에 낸 책 『제2언어 머릿속 사전의 탐구(Exploring the second language mental lexicon)』의 중국어판이 2007년에 나오기도 했다. 지은이에 대해서는 언어소통학과 홈페이지(http://www.tcd.ie/slscs/clcs/)를 참조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지은이가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듯이 단어가 언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실로 크고 언어의 모든 면이 단어와 관련되어 있다. 그러한 단어를 집합적으로 바라볼 때 어휘(語彙)라는 용어를 쓰고 어휘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언어학의 하위분야가 어휘론이 된다. 따라서 이 책을 어휘론 개론서 또는 더 나아가 언어학 개론서쯤으로 생각할 수 있겠다. 원서의 부제를 ‘An Introduction(입문, 개론)’이라고 붙인 지은이와 출판사의 의도도 그렇게 해석된다. 또 각 장의 끝에 본문의 내용을 간단히 정리한 「요약」, 관련 주제에 관한 좋은 참고논저의 소개, 그리고 「연습문제 및 토론거리」를 붙인 것도 개론서의 성격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 책을 개론서라고만 할 수는 없다. 현재 나와 있는 대표적인 어휘론 개론서로는 다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카터(R. Carter) (1998) 『어휘 : 응용언어학의 관점(Vocabulary: applied linguistic perspectives)』, 제2판, London: Routledge. [초판(1987). 원명옥 역(1998) 『어휘론의 이론과 응용』, 한국문화사, 초판의 번역]

  리프카(L. Lipka) (2002) 『영어어휘론 : 어휘구조, 단어의미론, 조어법(English Lexicology: Lexical Structure, Word Semantics, and Word-Formation)』, 제3판, Tübingen: Narr. [초판(1990), 제2판(1992)]

  잭슨(H. Jackson)·암벨라(E. Z. Amvela) (2007) 『단어, 의미, 어휘 : 현대영어어휘론 입문(Words, Meaning and Vocabulary: An Introduction to Modern English Lexicology)』, 제2판, London: Continuum International Publishing Group. [초판(2000)]


  이 책들이야말로 전형적인 어휘론 개론서라 할 수 있다. 이 책들은 어휘론의 세부 내용을 언어학의 틀에 맞추어 소개하고 어휘론 또는 언어학에 독자가 더 깊이 들어가는 길을 안내하고 있다.

  그런데 싱글턴의 이 책은 이러한 어휘론 개론서의 특징도 얼마간 지니고 있지만 그보다는 교양서로서의 특색이 진하다. 독자를 어휘론이나 언어학이라는 낯선 학문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려 하기보다 어휘론과 언어학의 주요 개념과 사실을 그 영역 밖으로 끌어내어 멀찌감치 서성거리고 있는 독자에게 가져다 바치는 식이기 때문이다. 또 독자가 그러한 개념과 사실이 학문적일 뿐 아니라 현실적이기도 함을 깨닫고 딱딱한 느낌을 덜 받도록 하기 위해 지은이는 언어학의 울타리를 자주 넘나들며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문체 또한 독자와 거리를 둔 채 객관적인 사실을 전달하는 식이 아니고 할아버지가 손자를 무릎에 앉혀 놓고 체험담을 들려주는 태도로 서술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휘론과 언어학의 주요 개념을 빠짐없이 그리고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식으로 서술하지는 않고 있다. 또 어휘의 통계적 분석과 같이 어휘론의 주요 내용이라 할 만한 것을 다루지 않은 것도 있다. 빠진 내용은 어휘가 언어의 중심이라는 책의 주제와 관련이 적은 것들이다. 주제를 향한 일관된 목소리가 책 전체에 울려퍼지고 있다는 점에서 개론서의 범주를 다소 벗어나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교양서를 자처하고 나설 만큼 대중의 인기를 염두에 둔 가벼우면서도 흥미로운 내용이 자주 나오거나 삽화나 편집 등의 면에서 시각적인 단맛이 나지도 않는다. 전체적으로 헐렁한 개론서와 소박한 교양서의 피가 반반 흐르는 책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 대한 언어학계의 관심은 적다. 개론서로 소개하거나 책의 내용을 인용한 예를 찾기 어렵다. 변변한 서평도 나와 있지 않다. 드웰(Jean-Marc Dewaele)이 쓴 서평은 찬사 일색에다 책의 내용을 장별로 요약한 정도이다(Applied Linguistics 23-2, 2002). 외국어로 번역한 것도 이 책이 처음이다. 이러한 소외는 이 책의 성격이 여러 가지로 어중간한 결과일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어휘론 책이라고 하기에는 다룬 범위가 넓고 언어학 책이라고 하기에는 빠진 내용들이 적지 않으며 개론서라고 하기에는 간결하게 정리된 맛이 부족하고 교양서라고 하기에는 독자의 흥미와 기분을 덜 헤아리는 것이다.


  언어학에서 어휘론을 본격적으로 문제 삼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이다. 19세기에 발달한 역사언어학을 언어학의 시작으로 본다면 언어학 이론의 역사는 다음과 같이 도식화할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 : 역사언어학

    20세기 전반 : 구조언어학(음운론→형태론)

    20세기 후반 전기 : 생성언어학(통사론)

    20세기 후반 후기 : 인지언어학(의미론)


  어휘론은 방언학, 사회언어학, 문자론, 화용론 등처럼 언어학의 주류에 낀 적이 없이 변두리에서 이어져 온 분야이다. 주류의 관심을 받게 된 때는 생성언어학이 통사론 중심으로 문장의 구조를 설명하는 데 한계를 느끼는 과정에서 ‘어휘부(lexicon)’라는 공간을 진지하게 들여다보게 된 1970년대 중반이라 하겠다. 그러나 어휘부는 어디까지나 형태론과 통사론을 보조하는 존재로 인식되었으므로 언어학의 주인공이 된 적은 없었다고 하겠다.

  이 책에서 지은이가 강조하고 있듯이 어휘는 언어의 거의 모든 면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에 언어학 이론도 어휘를 중심에 놓고 재정립해야 옳은지 모른다. 그렇다면 21세기 언제쯤에는 어휘론 중심의 새로운 언어학 이론이 등장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한 이론의 발원지가 부디 한국이길 바란다.) 언어학 이론의 역사가 그렇게 흘러간다면 이 책이 새 이론의 밑거름이 된 선구적인 업적으로 인정받게 될 것이다.


  이 책은 본문 열 장과 결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서론)에서 단어의 중요성과 개념을 검토한 뒤, 본론인 2장부터 10장까지는 어휘와의 이론적 관련성이 큰 문제에서 작은 문제의 순으로 배열하고 있다. 그리고 어휘를 보는 시야도 좁은 데서 넓은 데로 나아가고 있다. 각 장과 절의 분량이 뒤로 갈수록 점점 많아지는 경향은 이와 관련되어 있다. 그런데 어떤 절은 복잡하거나 어려운 내용이 길게 이어져 버티고 읽기가 괴로울 듯해서 옮긴이가 항을 나누고 소제목을 달아 놓았다. 5_5, 6_5, 9_3, 9_4, 9_6, 10_2, 10_3, 10_4가 그것이다. 10장에서 지은이의 주전공인 외국어교육에서의 어휘교육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10장 뒤에 결론을 따로 마련하여 책의 주제를 다시 강조한 것이 특별하다.

  원서에는 결론을 뺀 각 장의 끝에 「인용문헌과 더 읽을 거리(Sources and suggestions for further reading)」가 있다. 이 중 인용문헌을 소개한 부분은 참조주를 후주처럼 단 셈이다. 주석번호를 붙이지 않았으므로 일반적인 주석의 형태와 다르다. 주석번호도 없이 장의 끝에 많은 주석이 나열되어 있으므로 독자는 불편하다. 번역서에서는 이들을 모두 방주(傍註)로 달아 독자가 금방금방 참고할 수 있게 했다.

  원서에는 참고문헌란이 따로 없다. 번역서에서는 「인용문헌과 더 읽을 거리」에 나오는 모든 문헌을 일반적인 참고문헌란의 형식으로 책 뒤에 실었다. 색인도 원서보다 많은 항목을 뽑아 다시 작성해 실었다. 본문에서 주요 전문어를 굵은 글씨로 표시한 것도 원서에 없는 것이다.

  번역서 치고는 역주(譯註)를 꽤 많이 달았다. 원서가 영어로 쓰여 있고 지은이가 영어권에서 활동하는 학자이므로 영어 예가 가장 많고 유럽의 여러 언어의 예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이 책을 읽을 한국인 독자는 한국어 예를 궁금해 할 것이므로 역주에서 한국어 예를 보충했다. 지은이의 설명을 부연하거나 한계를 지적하기 위해 역주를 단 것도 있다. 책의 다른 부분을 참조하도록 안내하기 위해서도 역주에 신경을 썼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인다면 지은이가 “5장에서 언급했듯이”처럼만 표시한 것을 옮긴이는 되도록 “5_1에서 언급했듯이”와 같이 하위항목을 명시하려고 노력했다.


  지은이의 문장은 그런 대로 명료하지만 간결한 맛은 부족해서 늘어지고 꼬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우선 내용이 정확하고 간결하게 전달되도록 옮겨야겠다는 자세로 임한 옮긴이의 작업이 자주 덜컥거렸다. 지은이의 흔들대는 걸음을 옮긴이가 그대로 독자에게 전하지 않도록 애를 쓴다고 썼으나 여전히 남은 진동에 독자도 가끔 멀미를 느낄지 모르겠다. 그래도 한 문장 한 구절을 옮길 때마다 번역투를 벗어나 자연스러운 우리말 문장으로 되살리려고 힘을 기울였으니 어지간한 번역서보다는 읽을 만하리라고 기대한다.

  용어의 번역에서 관용을 따르지 않은 경우가 가끔 있는데 특별한 경우에는 역주에서 그 사실을 밝혔다. 이 자리에서 언급해 둘 만한 것은 ‘communication’을 ‘소통’으로 번역한 것이다. 이 단어를 흔히 ‘의사소통’으로 번역하고 있으나 이 말은 4음절이나 된다는 점에서 불편한 번역어이다. 그래서 ‘통보’라는 번역어도 제시된 바 있는데 이것은 일방적인 의사전달만을 뜻하는 느낌이 강해 부적당하다. 소통이라고 하면 교통소통 같은 물질적인 차원의 소통이 있고 의사소통 같은 정신적인 차원의 소통이 있다. 둘 다 소통은 소통이다. 언어학에서 문제가 되는 소통은 당연히 의사소통이므로 그것을 ‘소통’이라고만 해도 무방하다.


  인용한 문헌과 출처의 표시에 관한 관례를 잠깐 언급해 두고자 한다. 참고문헌을 인용할 때는 다음과 같이 ‘필자(연도)’ 방식을 따른다.


    Cook(1997) : 쿡(V. Cook)이 1997년에 낸 책 또는 논문.

    Cook(1997:14-18) : 그 책 또는 논문의 14쪽에서 18쪽까지.

    Cook(1997:14ff) : 그 책 또는 논문의 14쪽에서 그 뒤 몇 쪽까지.

  「한글 제목」, ‘영어 제목’ : 논문이나 기사.

  〈한글 제목〉, ‘영어 제목’ : 시, 노래가사 같은 짧은 작품.

  『한글 제목』, 영어 제목(이탤릭체) : 단행본 학술서.

  《한글 제목》, 영어 제목(이탤릭체) : 장편소설, 서사시 같은 단행본 작품, 정기간행물.


  ‘필자(연도)’에 뒤따르는 조사의 형태는 연도에 이어 발음하도록 맞추었다. 조사 ‘이/가’를 예로 들면 ‘Chomsky(1988)이’, ‘Chomsky(1988:15)이’, ‘Chomsky(1995)가’, ‘Chomsky(1995:4장)가’와 같이 적었다.


  한국어판을 내겠다는 뜻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번역과정에서 던진 질문들에 상세히 답해 준 이역만리의 지은이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또 책을 낼 때마다 옮긴이보다 더 많은 애정을 책에 쏟아 늘 새로우면서도 반듯한 책을 만들어 주신 삼경문화사의 박종성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끝으로, 지은이가 머리말에서 했던 인사도 옮겨야 할 처지이다. 가장 따뜻한 감사의 말은 지난 2년이 넘는 기간 내내 옮긴이를 여러모로 도와주고 참을성 있게 지켜봐 준 아내 곽용주와 아들 배강현에게 해야 하겠다.


2007년 12월 10일

배 주 채


* 더블린대학교(The University of Dublin)에 속한 대학은 삼위일체대학(Trinity College)이 유일하다. 그래서 이를 간단히 더블린삼위일체대학(Trinity College, Dublin)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일랜드에서 가장 오래고 권위 있는 대학교로서 1592년에 설립되었다.